Wednesday, June 24, 2009

중국을 다녀와서

중국...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는 대국으로 21세기를 맞아 다시 세계의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 관심이 가던 나라다. 나는 지난 6월 1일 처음으로 중국방문길에 올랐다. 교수퇴수회 장소로 선정되었기 때문에 교수들과 학교관계자, 그리고 총회임원들과 함께 인천공항을 떠나 여정에 올랐는데, 아시아나 항공으로 4시간을 비행하여 중국의 남서부에 있는 계림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우리를 처음 맞아준 것은 우중충한 공항과 무표정한 공항직원들이었고, 공항을 나가자마자 오염된 공기의 악취가 우리를 불안하게 하였다. 중국최고의 산수를 자랑한다는 계림이 자본주의로 오염된 실상을 대하면서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었고, 중국의 자연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현대인의 물질적 욕망으로 훼손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계림이라는 도시는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신흥 관광도시로서 여기저기 공사를 하며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계림이라는 말은 계수나무가 많은 도시라는 뜻으로 온 도시를 계수나무가 뒤덮고 있었는데, 달 속에 계수나무가 있다는 [산토끼] 노래가 생각났다. 가을에 꽃이 피면 온 도시가 향기로 넘친다고 한다.

그러나 계림이 유명해진 것은 이 지역의 뛰어난 산수때문인데, 석회암의 활발한 침식작용으로 3만 6천개의 오밀조밀한 산이 형성되었고 그 사이로 이강이 흘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산들은 높지 않고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한국의 산들과 같은 균형이나 웅장함이 없고 비뚤어지고 깍이면서 천태만상이었다. 문효식 목사님은 평소 중국산수화를 보면서 그 모양이 너무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여기 와보니 그게 아니라 실제의 모습 그대로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역시 한국의 산이 더 아름답고 좋아보였다.

이 지역은 베트남과 국경을 하고있는 중국의 변두리로서 동남아의 문화가 완연하고 기후도 아열대에 속하여 덥고 습기가 있었다. 또한 이곳은 소수민족 자치구로서 장족, 묘족, 요족 등이 많이 사는 곳이어서 전체적으로 낙후된 모습이었다. 마침 모내기를 하는 철이었는데, 산에 층층으로 조그만 논을 만들어 계단식 경작을 하고 있었으며 물소를 이용하여 논을 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시받는 소수민족들의 지역이어서 보다 순수한 모습들이 있었지만, 중국정부가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모든 것을 상품화하여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중국인들은 참 재물을 좋아한다. 집집마다 문설주에 재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하는 글을 써서 붙여놓았다. 종교는 모두 혼합되어 기복화되었다. 불교, 도교, 힌두교 등이 혼합되어 모두 재복과 장수를 기도하고 있었다. 불상으로 가득찬 동굴을 통과한 강변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복을 받는다고 돈을 내고 쇠북을 치는데 그 뒤에 있는 바위에는 [기복]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져 있었다.

공자의 나라였지만 예의가 없었고, 재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가짜의 왕국이었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나라였다. 이 사람들에게 물질주의적인 공산주의가 반 세기를 지배하였고, 이제 또 무윤리적인 자본주의가 팽배하면서 중국의 미래가 너무 걱정스러웠다. 물론 모든 인간이 재복을 원하지만 그래도 체면이 있고 대의명분이라는 것이 있어서 외식일지라도 겉으로는 정의나 사랑을 내거는데, 중국이라는 나라와 사람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재복을 추구한다고 써붙이고 주장하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유별나다. 정신문명이 풍요한 나라로 거론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오늘의 중국은 정신문명이 빈곤한 나라였다. 불어나는 물질을 감당할만한 종교도 철학도 없는듯하였다. 내가 본 중국은 일부이며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 사실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중국선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되었다. 중국에도 외교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강태성 총무처장님은 그와 같이 빈곤한 가치관을 채워줄 책임이 바로 기독교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오로지 기독교의 복음만이 많은 물질을 감당하면서 건강한 세계제국으로 부상하도록 중국을 지도해줄 수 있다는 말이다. 나만을 위한 기복적 신앙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살려는 마음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내 뇌리를 채우면서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마음속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중국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대국이다. 중국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나라가 될 때 세계복음화는 힘차게 진행될 것이다. 중국에서 예루살렘까지 책임지겠다는 중국교회 지도자들의 믿음이 이루어질 것이다. 중국인은 스케일이 크다. 계림의 복파산을 오르려니 입구에 마원장군의 기마상이 있었다. 베트남이 공격하자 중앙에서 마원장군이 내려와 화살을 쏘았는데 산을 몇개나 뚫어 구멍을 내면서 날아가 베트남에 꽃혔다는 전설을 표현하고 있었다. 베트남이 얼마나 떨어져있는데... 중국인의 허풍은 대단한데, 그것이 사실이 아닌줄 알면서도 그것을 생활화하고 믿는 것 같았다.

이강에서 산들을 배경으로 장이무 감독이 연출한 수상오페라 [인상유삼저]를 관람하였는데, 열개도 넘는 주변의 산을 모두 조명하며 8백명의 출연진이 강위에서 배를 타고 노래하는 대작의 스케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런 중국의 저력이 자본주의에의 종속과 윤리의 실종으로 세계를 몰락하게 하지 말고 복음의 지도적 국가로서 성장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의 화해와 사랑을 이끄는 민족으로 거듭나고 축복받기를 기도하였다. 이를 위해 나도 무언가 일조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Thursday, January 1, 2009

원장님 내외분 묘지

오늘은 2009년 새해가 시작하는 1월 1일이다. 송선호 목사가 우리 부부와 정정관 목사를 초대하여 함께 점심을 하고 원장님 내외분 산소를 방문하였다. 두 분의 산소는 로스 앤젤레스에 온 한인들이 가장 많이 묻혀있는 Rosehill 묘지에 안장되었다. 입구에 있는 꽃 집에서 원장님과 사모님 묘지에 놓을 꽃 두 다발을 사서 올라갔는데 1월 1일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묘지를 찾아와 복잡하였다. 올라가면서 보니 꽃도 많지만 여기저기 성탄장식을 한 무덤들이 많았다. 원장님 내외분의 산소는 산 정상 조금 아래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는데 산 전체가 무덤이라 찾기가 쉽지 않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는데 거의 정확히 찾아가 쉽게 두 분의 산소를 찾았다.

먼저 두분의 산소 앞에 꽃을 꼽고 송선호 목사가 두 분을 생각하며 기도를 드렸다. 그런 뒤 사진을 찍었는데, 미국은 봉분을 하지 않고 평토장을 한다. 그래서 비석도 땅에 깔아놓기 때문에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내 아내와 송 목사 사모가 물을 받아와 꽃에도 주고 비석을 윤나게 딱았다.

원장님 내외분을 그리며 나와 송선호 목사, 그리고 정정관 목사가 함께 사진을 찍고 가족별로도 사진을 찍었다. 이제 모든 고생을 멀리하고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지내시며 이 땅에서처럼 정답게 지내실 생각을 하며 산소를 떠나 돌아왔다. 두 분은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우리 삶의 좌표가 되실 것이다.

Monday, October 27, 2008

수연이의 의대 입학


지난 8월 중순 내 사랑스러운 딸 수연이의 의대 입학식에 참석하였다. 의대는 미조리주에 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가는 의과대학원이다. 한국은 대학부터 의대로 들어가 예과 본과를 거치지만 미국은 대학에는 의대가 없고 대학원에만 의대가 있다.

수연이는 네델란드에서 국민학교를 다닐 때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하였다. 의료 선교사가 되겠다는 것이다. 화란에서 명문 중학교 김나지움에 들어가서도 공부를 아주 잘 해서 가만히 있어도 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수연이의 꿈이 깨지고 말았다. 영어와 화란어로 공부하였기 때문에 한국학교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영어나 불어는 잘 했지만 그 이외의 과목은 교과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여 성적이 좋지 못하였기에 한국에서 의대를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나에게 한번도 불평을 하지 않고 항상 웃음과 감사를 잃지 않았던 수연이가 어느 날 내게 호소하듯이 눈물을 글썽이며 "아빠, 꼭 한국에 왔어야 했어요?"하고 말했을 때 내 마음이 찢어지는듯 하였다.

결국 세 아이가 모두 비슷한 상황이어서 그들의 인생을 위해 아이들만 미국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텍사스로 보내어 고3부터 공부를 하면서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다시 희망을 가지고 공부를 회복하였고,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의과대학원에 갈 수 있는 좋은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대학 3학년때 교회에서 대학생회장을 맡아 교회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성적이 떨어져 의대 입학이 어렵게 되었다. 수연이도 우리 부부도 실망하고 포기하는줄 알았으나, 대학 졸업 후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의대 수능시험인 MCAT을 혼자 열심히 준비하여 금년에 의과대학원에 합격하여 수연이가 국민학교 때부터 헌신한 기도가 이루어졌다. 항상 우리 가정과 나에게 기쁨을 주었던 사랑하는 딸 수연이의 인내와 노력이 대견하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다.

이제 의과대학원 4년의 힘든 학업을 마치고 수련기간을 거쳐야 의사가 되지만, 지금까지 함께해주신 주님께서 모든 과정을 다 잘 마치고 좋은 의사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하고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귀한 딸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내가 가슴을 다쳐 아픈 몸으로 먼 길을 가서 참석한 여행이었지만 너무 기쁘고 큰 위로가 되었다.

Tuesday, May 27, 2008

영원한 동행을 위해 하늘로 가신 김희선 사모님


주일 아침 교회를 가기 전에 백인열 목사가 보낸 이메일을 받았다. 제목은 "사모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그 순간 많은 생각이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하늘로 가셨구나! 작년에 이진태 원장님을 하늘로 보내고 몸과 마음이 고통의 나날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너무 죄송했었는데... 멀리 이국에 있어 문병 한 번 못하고 외로울 때 전화를 주시면 아내와 한 없이 대화하셨고 또 아내가 자주 전화를 드리면서 나는 대개 아내를 통해 사모님의 아픈 마음을 듣곤 했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고통과 외로움을. 나는 부음을 듣는 순간 아내에게 말했다. 사모님 기도가 들어진거야. 사모님은 원장님을 보내내시고는 1년만 더 살면서 뒷정리를 하고 1주년을 잘 한 다음 원장님 따라 하늘로 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래 차라리 잘 되었다. 원장님을 사랑하고 내조해야 된다는 일념으로 사신 분인데 원장님 안 계시는 세상을 살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기도를 그대로 들어주신 것을 보면. 천사 같은 원장님을 수호 천사 같이 지켜주신 사모님의 일생이 너무 아프고도 귀하다. 암 말기와 당뇨가 겹쳐 고생길만 남아있었는데... 차라리 잘 된 것이다. 하나님이 사모님을 불쌍이 여기신 것일게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움과 아픔이 남겠지만... 얼마전 한국에서 1주기 추도식을 잘 마치고 추모문집 [동행]이라는 책과 CD를 보내주셔서 본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45년의 동행이 부족하여 영원한 동행을 위해 하늘로 가신 것이다. 한국 정리하고 미국에 와서 사시면 잘 모시려 했는데...

오늘 한국에서 장례식을 한다고 서요한 교수가 전화로 알려왔다. 그리고 어제는 유해가 미국으로 오면 하관식 주례를 해달라고 여기 사는 조카가 전화를 주셨다. 주일 예배 후 화요일 한국을 방문할 송선호 목사를 만나 혹시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어렵겠다. 이제 여기 오시면 원장님 옆에 같이 누워 영원히 동행하게 될 하관식에서나 뵐 수 있겠다. 시인의 감성과 여장부의 용기를 겸비하신 사모님을 이 땅 위에서는 다시 뵐 수 없겠지만...

Thursday, May 8, 2008

손봉호 교수님과 함께

내가 처음 철학을 접한 것은 대학 1학년때였다. 당시 총신대 신학과는 두 전공으로 나뉘었고, 그 중에서 나는 기독교철학을 선택하였다. 내 처음 철학교수는 당시 한국철학회 회장이었고 중앙대 교수였던 서동익 박사였다. 그는 내게 철학적 사고를 가르쳐주었고, 특히 데카르트를 배우게 되면서 내 신앙에 대한 철학적 비판의 과정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2학년때 소천하는 바람에 한참 철학에 심취하다 선생님을 잃었는데 마침 화란에서 손봉호 교수님이 귀국하여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3-4학년 철학전공 모든 과목을 손 교수님에게 배웠기 때문에 비록 외대 교수로 있었지만 내 지도교수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시면서 나는 학교뿐 아니라 실례인지도 모르고 댁으로까지 찾아가 배웠다. 또한 기독교철학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이 되었고 손 교수님이 지도교수였기 때문에 항상 가까이서 모시고 배웠다. 화란의 기독교철학자 헤르만 도이베르트의 4권으로 된 New Critique of Theorethical Thoughts를 읽어나가고 전문용어집을 만들면서 나의 철학적 사고가 형성되었다. 또한 손 교수님의 학위논문을 공부하고, 그가 전공한 칸트와 훗설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칸트의 주저를 모두 독파하였다. 그 외에도 철학사 전반에 걸쳐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한국철학회에도 참석하여 다른 철학교수들과도 접하게 되었다. 그 때 같이 기독교철학회에서 공부하였던 친구 문석호는 대학 졸업후 대학원을 철학과로 진학하여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 후 미국에 와서 신학도 공부하였으나, 모교로 부임하여 철학신학 교수가 되었다. 또 손 교수님을 따르던 신국원은 가다머를 전공한후 모교로 돌아와 문화철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후배들이 손 교수님의 영향으로 철학에 심취하였으며 심지어 철학계로 진로를 바꾸기도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손교수님이 서울영동교회를 개척하자 나를 부르셔서 그 교회 초창기에 교육전도사로 섬기기도 하였다. 손 교수님은 고신이라 그를 통해 고신 개혁그룹과 접하게 되었다. 또한 그 동안 교수님이 쓴 원고들을 모아 책을 출판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그 책이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이다. 그리고 79년 유학을 떠나는데도 중요한 도움을 주셨고, 그 후에 미국에 있어 뵙지 못하였지만 항상 잊지 않았다.

더욱이 칼빈신학교에 유학을 와서 처음에는 교회사를 전공하려고 하였으나 내 사고의 틀이 역사적이기 보다는 철학적이어서 결국 전공을 조직신학으로 바꾸게 된 데에도 손 교수님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또한 손 교수님을 존경하게 된 것이 아마도 그가 공부한 화란 자유대학교에 대해 호감을 주었는지 결국 나도 박사학위를 위해 화란 자유대학교를 선택하게 되었다. 위에 있는 사진은 내가 화란에서 공부할 때 손 교수님이 유학후 귀국한 다음 처음으로 다시 화란을 방문했을 때 우리집에 오셔서 우리 정원에서 같이 찍은 사진이다.

손 교수님은 후에 유명한 분이 되었고, 기윤실을 창설하여 사회적으로 적극적인 활동가의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내가 95년 귀국한 후에 기윤실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손교수님은 한결같이 진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존경심이 매마르지 않는다. 내가 손교수님의 사회윤리사상이라는 글을 발표하자 교수님은 내가 자신보다도 더 자기를 잘 안다고 고마워하셨고, 창조적인 신학자가 되어서 자랑스럽다는 칭찬도 들었다. 내가 아무리 해도 그분의 명석한 사고와 수려한 언어와 일관된 삶을 따를 수는 없지만, 내 삶에 그 분이 들어와 내 스승이 되어주신 것을 항상 자랑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Wednesday, April 16, 2008

대학시절 교수님들과 함께


대학신문 편집국장 시절이다. 교수님들을 모시고 서율역 그릴에서 좌담회를 가지게 되었을 때 찍은 기념사진이다. 박아론, 김의환, 김희보, 박윤선, 김득룡 교수님이 앉아계시고, 뒤줄에는 신문사에서 함께 활동했던 노홍빈 기자, 김영우 학술부장, 나, 그리고 장정일 주간이다. 유신과 계엄으로 점철된 군사독재시절 대학신문에서 활동하며 어려움도 많았고 재미있는 사건도 많았다.

교수님들과의 만남은 나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박아론 교수님은 박형룡 박사님의 아들이었는데, 행동방식이 특이하였으나 새벽기도의 신학이라는 창조적인 저서를 쓰기도 하였다. 김의환 교수님은 고3때 전국 학생 수양회에서 처음 만나면서 따르게 되었고 대학시절 그가 시작한 새한교회와 에덴교회에 출석하였으며 조교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나를 여러모로 이끌어 주었으며, 결혼과 유학, 목사 안수 등 깊은 관계를 맺으며 복음주의적 열린 마음과 개혁 정신을 불어넣어 줌으로서 나의 첫 은사가 되었다. 김희보 교수님은 당시 학장이였는데, 내가 많이 힘들게 해드려 개인적으로 마음이 죄송하다. 박윤선 교수님은 내가 처음으로 알게된 신학자시다. 고1때 학생회에서 매주 요한계시록 강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담임목사님이 박윤선 교수님의 요한계시록 주석을 주시면서 그대로 하라고 하여 한 글자 놓치지 않고 거의 외다시피 정독하고 이해하였기 때문에 그 때 누군지 몰랐지만 나에게 최초로 신학을 접하게 해 주신 분이다. 총신에 와서 만나뵈었으며, 재학시절에도 사랑을 받았다. 미국에 온 후 덴버 인턴시절 그의 막내따님을 만났고, 로스 앤젤레스 아케디아에 살 때 큰 따님과 앞뒤집에 살아 박 교수님 자녀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덴버에서 따님집에 오셨을 때 모시고 록키산에 올라간 일이 있는데, 절경에서도 계속 기도만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항상 인자하고 명철한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김득룡 교수님은 신문사 지도교수로서 유신시절 우리로 인해 힘든 역할을 감당하였으나 정이 많으셨고, 미국에서 자녀들이 캘빈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가까이서 지내게 되었다.

노홍빈은 동향이고 영특한 후배였다. 김영우 선배는 대학시절부터 정치에 관여하며 김옥길 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나도 선거감시단으로 따라 간 일이 있는데, 지금은 합동교단 정치실세가 되었다. 장정일 선배도 아프리카 선교사를 다녀온 후 성도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어제 같은데 벌써 35년전 사진이 되었다.

Saturday, April 12, 2008

박형룡 교수님과의 만남

한국 보수신학의 창시자인 박형룡 박사님과 만난 것은 총신대를 입학하면서였다. 그 만남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지 못한채 함께 사진이 찍혔다. 대학 1학년때 교양학회장을 맡았는데, 그 때 학장이였던 박형룡 박사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기 전에 내가 기도하고 있다. 그 후 이 만남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영향을 받았고 내 신학의 기초를 형성하였으나, 미국에 유학온 후 점차 극복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분의 삶과 신학을 재조명하게 되었고 새롭게 인식하였다. 비록 그가 신학적으로 한국 장로교회를 분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지만, 그가 지키고자 했던 역사적 기독교신앙에의 열정과 헌신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이 가장 많이 외친 말은 "그루터기"였다고 기억된다. 통합과 분리한 후 외로움과 어려움에 시달리면서도 합동교단이라는 그루터기가 자라나서 큰 상수리나무가 되리라는 일념으로 사셨는데, 오늘날 그 바램은 이루어져서 수적으로 통합을 능가하는 최대의 교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후유증은 지금도 남아 합동교단과 총신이 극복해야할 중요한 과제를 남겨주었다.